한국일보

사랑하는 전우 조창호 중위의 명복을 빌면서 삼가 영전에 추도의 염을 바친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지난 1994년 4월 어느 날 신문에서 ‘국군포로 조창호 소위, 43년 만에 극적으로 귀환’이란 보도를 읽고 깜짝 놀랐다. “아니 국군포로가 아직도 북한에 있다니”라며 문득 한국전쟁에서 실종 당한 부하 장병들을 다시 기억했다.
1958년 미국에 유학온 후 바쁜 이민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그의 북한탈출을 계기로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전우애를 다시 느끼며 북한에 억류당한 국군포로들을 어떻게 하면 조국의 품안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가로 고심했다. 그리고 지난 2003년 11월 조 중위를 서울에서 만나 함께 국군포로 송환운동을 벌이자고 약속했다.
이후 그는 한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태평양을 넘나들며, 미국 조야에서 북한정권의 포로학대와 북한의 참상을 세계에 고발하는 인권운동에 앞장섰다. 돌이켜보면 그는 우리사회와 전세계에 잊혀진 전쟁에서의 국군포로 인권의 산 역사요, 산 증인이었다.
그는 북한에서 43년 동안 온갖 감시와 학대 속에서도 대한민국 군인으로서의 불굴의 의지와 과감한 용기로 북한 공산집단으로부터 탈출해 한국 군인의 표상이자 귀감이 되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지난해 4월 디펜스 포럼재단과 미주 국군포로송환위원회가 주최한 포럼에서 그가 “저는 포로임에도 불구하고 정치범 수용소와 일반감옥 등에서 13년을 복역했으며 또 수년 간 아오지 탄광 등에서 강제노역을 당했습니다. 치솔이나 마스크는 물론 담요나 이부자리도 없이 노예보다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라고 폭로할 때 미국 정계의 많은 참석자들은 신음을 토해냈다.
이어 지난 4월 연방의회 국제관계위원회가 개최한 북한 인권청문회에서도 북한 공산정권의 비인간적이며 야만적인 인간살육의 참상을 고발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으로 우리사회는 국군포로 문제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사랑하는 전우 조창호 중위가 부디 파란만장했던 지난 시절의 무거운 짐을 벗고 평안히 잠들기를 기원한다.

<정용봉> 국군포로 송환위원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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